마음의 양식

믿는데 속일 필요가 없지요

꿈꾸는 트레버 2008. 3. 10. 20:54

경주역 앞 작은 버스 정류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종일 팔아야 하는 오렌지는 다섯개씩 쌓아 올린

열 무더기가 전부,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지도, 맴도는 비둘기들을

쫓지도 않는 그녀는 세상에 눈꼽만큼도

폐를 안끼치려는 듯 최대한 웅크리고 앉아 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뛰어오는 사람들은

그녀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지나칠 만큼

그녀는 오래된 정물같다.

 

감포를 가는 버스를 두리번 거리다 그녀를 봤다.

푼더분해 보이는 그녀 얼굴을 보자 여행 내내

그녀의 오렌지를 우물거리며  다녀도 좋겠다

싶었다.값을 묻자 벌덕 일어난 그녀는 연방 머리를 조아며

3,000원 이란다.

 

허리춤에서 쭈글쭈글한 비닐봉지를 꺼내 오렌지를

담아주는 그녀에게 5,000원을 건넨다.

거스름 돈을 받으려는데 그녀가 멍하니

망설이고 서 있다.

내 눈을 오롯이 바라보고 서선 아무 말도 없다.

 

그러더니 전대에 손을 넣어 안에 있던 돈을

전부 꺼내 두 손에 받쳐 들고는 쫙 펼쳐

내 가슴앞에 밀어놓는다.

셈을 못하다는 부끄러움을 감추고싶은 표정

그러나 돈은 벌어야겠는 마음,

 

그러나 속고 싶지는 않은삶,

그것들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는 그녀 손에서 1,000짜리 두 장을 천천히 집어든다.

그러나 그녀는 내가 집어 드는 돈을 보고 있지 않다.

여전히 내 두 눈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의심하는 눈빛도 애원하는 눈빛도 아니다.

당신 셈을 믿는다고,

당신도 내 오렌지를 믿고 사지 않느냐고,

당신이 세상에서 누군가를 속이지도 않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고 있다는 걸 믿는다고 말하고 있는 눈동자.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건네는 그 말들 앞에서 슬며시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다.

그러자 그녀는 세상의 불신에서 무장해제된 사람처럼 그제야 말을 꺼낸다.

"내겐 모두 선생이니까..................세상 사람들은 내게 다 선생이에요."

돈 세는 데엔 너무도 익숙한 내가 셈할 줄 모르는 상인 앞에서

머리 조아리며 생각한다.

돈은 헤아릴줄 알아도 사람 마음 헤아릴 줄은 모르고 살았다고

셈 할줄 모른다 해도 진심을 통하게 하는 이라면 가장 좋은 상인일 거라고..............

 

정영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