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초부터 우울합니다. 제가 지난해부터 달리기를 좀 열심히 했습니까.

술에 절어 살다간 애들 대학 가는 것도 못 보고 지구를 떠나겠다 싶어

퇴근하기 무섭게 헬스장에서 매일 7㎞씩 달렸다 이 말입니다.

이 악물고 뛴 데는 집사람에 대한 배려도 있었지요. 결혼 13년이면 천하의 잉꼬라도 별수 없잖습니까.

또 맞벌이하다 보면 주위에 훤칠한 남자들 숱하게 볼 텐데

적어도 개구리 배만은 면해야겠다 다짐했지요.

그리고 마침내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배 아래 두 발이 보이는 건 물론이요 빨래판,

아니 식스 팩까지 생겼다 이 말입니다.

하여 며칠 전 작심하고 와이셔츠를 벗어젖혔지요.

'짜잔~'

한데 반응이 영 썰렁합니다. '좀 찌그러져 그런가?'

머쓱한데, 집사람 입에서 참으로 혹독한 멘트가 튀어나옵니다.

"너만 살겠다 이거지?" 이어 살벌한 연설이 이어집니다.

"넌 시간이 남아 도는구나, 난 종일 회사서 시달리고 집에선 애들한테 부대끼다

세수도 못하고 고꾸라지는데,

넌 팔자가 늘어졌구나, 제자리 뛰기에 펑펑 쓸 돈 있으면 불쌍한 마누라 보약이나 해주라….

" 빨래판은 삽시간에 쪼그라들고,

기가 차고 억울해 엉엉 울고 싶더라 이겁니다.
#2

내 사정도 그리 유쾌하진 않네.

들어보게. 내가 딸 둘을 연년생으로 낳고

카사노바에서 달라이 라마로 인생을 바꾸지 않았겠나.

그 좋아하던 술집도 끊고, 담배도 끊고,

심지어 기도라는 걸 하기 시작했네. 좀 험한 세상인가.

그런데 어느새 말만해진 딸들이 애비를 종 부리듯 하는 게야.

툭 하면 "아빠, 물 떠다 줘" "다리 주물러줘" "리모컨 좀"….

"이젠 늙은 애비 시키지 말고 힘 남아도는 니들이 해라"

그러면 "울 아빠가 변심했네"

"가부장이네" 코맹맹이로 징징대는데 아주 징그러워.

취직해서 돈이나 벌어오면. 마누라한테도 속았지.

딸들은 어릴 때부터 공주로 키워야 시집 가서도 왕비 대접을 받는다기에

해달란 대로 다해줬더니 이 꼴이 뭔가.

딸년들 공부방, 옷방은 있어도 내 방은 없어.

퇴근하면 내 소지품 놓을 데가 없다고.

마누라 차지한 안방에서 쪽이불 펴고 잘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지.

김수현은 왜 '아빠가 뿔났다'는 안 쓰는 거야?

#3

왜들 그래, 아마추어같이.

그러게 마눌님께 '연약한 당신,

새해엔 헬스 좀 해볼 테야?' 먼저 권했어야지.

면박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 꿋꿋이 환상의 퍼레이드를 펼쳤어야지.

그리고 달라이! '또 딸'이었을 때 회식을 핑계로 병원은 그 다음 날 갔지 아마?

지난 설 명절 두 아들 거느리고 입장하는 동서를 부러워 죽겠다는 눈길로 바라봤지?

엊그제도 단골집 마담에게 문자 날렸지?

아내에겐 1000개의 눈이 달렸나니, 반드시 복수한다네.

 

이게 50대 남편들 현실이 아닐까?

(조선일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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